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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이 고향인 국보 문화유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5-03 10:12
조회
586
정문경, 개태사 금동대탑, 청동방울일괄(7점)

 

우리지역 논산이 고향인 문화유산 중에서 국보는 3점이다. 개태사 ‘금동대탑’과 청동기 ‘청동방울일괄(7점)’ 그리고 청동기 ‘정문경’이다.

문화유산회복재단에 따르면 “국보 ‘청동기방울일괄(7점)’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수집가 ‘이치다 지로’가 수집하여 광복 후 일본으로 반출하려다가 실패하고 유물수집가 김동현의 수중으로 들어갔다가 1987년 삼성 이병철에게 매도되어 리움미술관에 소장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개태사 금동대탑’도 리움미울관에 소장되어 있다.

논산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이처럼 귀중한 문화유산이 있다는 것 자체로도 긍지이자 보람이지만, 정작 논산에서는 볼 수 없다는 점이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상속세를 대납하기 위해 물납제로 문화유산을 국가에 기증할 경우, 영국과 일본 등에서는 “유산의 출토지에 우선 공개한다”는 제도 등을 참고하여 적극적으로 논산 시민에게 ‘전시의 우선권’을 요청함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국보 ‘정문경(다뉴세문경)’은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병의 참호 작업 중에 출토되었다”는 등의 여러 의견이 있지만, 현재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보 정문경(다뉴세문경)


 

국보 ‘정문경’은 고리가 많은 가는 무늬 ‘청동거울’이다. “1960년대 논산훈련소에서 참호를 파던 병사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정문경’은 1971년 국보(제141호)가 되었다.

정문경은 기원전 3~2세기를 살았던 장인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복된 동심원과 그 동심원 안에 새겨진 무늬, 그리고 직선을 규칙적으로 새긴 삼각문양 등이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 2300년 전 청동기 시대 장인이 어떻게 이러한 극초정밀의 문양을 새기고 또한 주조했을까?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정문경’을 만든 장인은 황금 비율로 알려진 구리와 주석의 67:33 비율을 맞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구리와 주석의 비율에서 주석의 함유량이 높아질수록 은백색을 띠면서 거울의 빛 반사 성능은 좋아지는 반면 인장강도가 약해지기 때문에 깨지기 쉽다.

또한 ‘정문경’을 만든 장인은 ‘아차하는 순간 깨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0.3~0.55㎜ 간격’으로 1만3천여 개의 선과 동심원을 천신만고 끝에 다 그려놓았다. 이런 것을 보면 청동기 제작 기술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최상의 황금 비율로 제작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래서 ‘정문경’은 처음부터 ‘국보거울(국보경)’로 일컬어질 만큼 ‘국보 중 국보’로 통했다.

국보 청동방울일괄(7점)


 

청동기시대 의식을 행할 때 흔들어 소리를 내던 청동방울로 ‘국보 제146호’이다. 출토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나 문화유산회복재단 측에 따르면 “논산 황화정리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8각형 별모양으로 각 모서리에 방울이 달린 팔주령 2점, 포탄 모양의 간두령 2점,  X자 모양으로 교차된 조합식쌍두령 1점, 아령 모양의 쌍두령 2점이 국보 ‘청동방울 일괄(7점)’이다.

팔주령은 8각형 별모양으로 각 모서리에 방울이 하나씩 달린 형태이다. 방울 부분은 길게 구멍이 나 있으며, 그 안에 있는 청동 구슬이 흔들면 소리가 나도록 구성되어 있다.

또한 간두령은 포탄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아래쪽에는 테두리가 달려 있어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무늬를 볼 수 있다. X자 모양으로 교차된 조합식쌍두령은 방울이 달린 끝 쪽이 교차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방울은 팔주령의 것과 동일하다. 쌍두령은 아령 모양이며 양쪽에 방울이 있다. 방울에는 각각 4개의 구멍이 있고 사이에 무늬가 새겨져 있다.

소리를 내는 용도로 보아 청동기시대에 만든 의식용 유물들로 추정하고 있다. 정교한 제작 솜씨를 통해 당시의 발달된 주조 기술은 물론이고 신앙이나 의식 연구에도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유물은 일괄로 등록되어 있다.

국보 개태사 금동대탑


 

‘개태사 금동대탑’은 고려 전기(10~1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대 ‘개태사지’에서 도굴꾼에 의해 반출되었다가 현재는 리움미술관에 전시 중이다. 1984년 국보 제213호로 지정되었다.

‘금동대탑’은 절의 중심적인 존재라기보다 건물 안에 장식품으로 안치한 것이다. 탑의 성격보다는 공예품으로 볼 수 있다. 공예품이 50㎝가 넘는 것은 극히 드문데, ‘개태사 금동대탑’은 목조탑을 충실하게 모방하면서 매우 크게 만들어진 ‘금동탑’이다. 현재 높이만도 155㎝가 넘는 큰 규모다. 기단은 63×63㎝의 크기로서 이중 기단 위에 탑신을 올렸는데, 전체 5층이며 각 층은 따로 주조하여 만들었다.

불교가 크게 융성했던 고려시대에는 불탑을 조성하여 공덕을 쌓는 일이 널리 행해졌다. 하지만 모든 이가 많은 재화와 인력이 필요한 큰 탑을 만들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그 대신 단단한 금속으로 작은 탑들을 많이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탑의 표면에는 나무로 지은 탑의 구조를 섬세하게 표현하였고, 부처의 모습을 촘촘히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이 탑은 고려시대 사람들의 깊은 신앙심을 전해주는 동시에, 지금은 사라진 당시 목탑 모습을 복원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 이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