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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을 준다해도 받지 못한 한국 정부 – 고려청자 사건-

작성자
chrf
작성일
2020-11-04 17:07
조회
400
『중앙일보』 1990년 4월 10일자 기사

1990년 4월 6일. 부산시경은 일본의 한국 골동품 수집가의 집에 침입하여 고려청자 등 9점(시가 10억 원 상당)의 골동품을 훔쳐와 국내에서 처분하려던 골동품 중개상 김수홍을 특수강도혐의로 구속하고, 중개상 4명을 장물알선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김수홍과 김정일은 1990년 3월 11일 오후 2시에 일본 고베의 히가사 겐이치(日笠健一)의 집에 침입하여 혼자 있던 히가사의 부인을 생선회칼로 위협한 뒤 종이테이프로 입과 손발을 묶고 진열대에 있던 고려청자 등 9점을 강탈했다는 것이다.


김수홍은 1990년 3월 12일 강탈한 골동품을 싸구려 도자기로 위장하여 김해공항을 통해 국내에 반입했다. 그 후 1점을 국립박물관에 감정을 의뢰하고, 4점은 골동상에게 선금 1천6백만 원을 받고 팔았다. 이들이 훔쳐온 골동품들은 청자 6점과 백자 3점으로 모두 일제 때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이 중에 일부는 국내 박물관에도 없는 희귀한 것으로 밝혀졌다. 마이니치신문은 “히가사 겐이치 씨 집에 강도가 침입, 한국 도자기 9점을 강취해 갔다”는 내용을 대서특필했다.


히가사는 고베시 중심가에 5층짜리 빌딩을 소유하고 요리점을 운영하는 재력가로, 지난 60여 년 동안 한국 골동품을 많이 수집하여 일본에서는 꽤 알려진 수집가이다. 그가 소장하고 있는 도자기는 한국 도자기 2백여 점, 중국 도자기 1백여 점 등 모두 3백여 점을 소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조선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전쟁 전 한국의 골동품상들이 일본의 업자들과 손잡고 동경에서 도자기 전시 및 판매에 열을 올렸다. 당시 가격으로는 얼마 안됐기 때문에 이런 경로를 통해 도자기를 하나 둘씩 사 모았다. 일제시대에는 업자들이 전국을 돌며 도굴품 등을 입수해 시장에 내다파는 경우가 흔했다”고 수집경로를 밝혔다. 『조선일보』, 1996년 12월 30일자. 문제의 골동품들은 60년 전에 일본으로 반출되어 전매되다가 40년 전 한큐(阪急)백화점에서 구입하여 소장해 왔다고 했다. 히가사는 4월 6일 일본에서 교토통신과의 회견에서 자신의 물건이니 돌려달라고 하고 수사당국이 반환을 거부할 경우 “한국에 가서 변호사를 선임하여 법정투쟁이라도 벌이겠다”며 골동품을 되찾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범행 동기.

김수홍은 1951년부터 세무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1962년부터 10년 간 개인 사업을 경영하면서 골동품에 취미를 가져 상당수의 골동품을 수집하였다. 1976년에 부인이 암으로 사망한데다 1979년에 사업마저 실패한 뒤, 1980년부터 일본의 한국문화를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에 장기간 체류하며 골동품 중개업을 하였다. 골동품 중개상을 해오던 김이 히가사를 처음 접촉한 것은 1989년으로, 일본 고베시에 있는 재일동포 최모씨의 집에 방을 얻어 기거하던 김이 히가사가 우리나라 골동품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히가사의 집을 방문하였다.
히가사 겐이치와 만나 소장품을 감상한 김은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여러 차례 끈질긴 골동품 반환 설득이 시작되었다. 한국 정부에 요구해 훈장을 타게 하고 기념동상을 세워주겠다고 끈질기게 설득을 하였다고 한다. 김의 설득에 감화를 받았음인지 히가사는 드디어 1989년 8월에 “응분의 댓가를 지불하되 일본 국세청에서 탈세 등의 말썽이 없도록 해달라”는 조건을 붙여 이를 승낙했다. 김수홍은 1989년 9월에 히가사 집을 찾아가 “한국학 연구 자료로 필요하니 소장하고 있는 고려청자 등 9점을 촬영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여 사진을 찍어 오기도 했다.


골동품 판매 알선을 하던 김은 한국 모 재력가로부터 구입하겠다는 언질을 받고 본격적으로 주선에 나섰다. 김은 1989년 12월 20일 다시 출국하여 히가사를 만나 골동품을 흥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히가사가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태도를 바꾸자 이에 격분하여 범행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범행동기를 밝히고 있다. 검거된 김은 “방법은 비록 나빴지만 이런 식이 아니면 수탈당한 우리의 문화재를 찾아올 방법이 없었다”며 자신의 절도행위를 민족감정에 결부시켜 합리화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구속된 김은 문화재보호법위반 등 전과범으로 밝혀졌다.


국내 반응.

일본서 훔친 청자, 백자 등 국보급 문화재 9점을 밀반입하여 국내에서 팔려던 골동품 중개업자가 검거되자 사건 자체보다 장물에 해당하는 문화재의 향방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일본에까지 건너가 물건을 강탈한 행위는 명백한 강도행위지만 훔친 물건이 국보급이며 원소유주가 우리나라인 점, 우리나라 문화재를 수없이 반출한 일제의 수탈행위에 대한 민족감정까지 얽혀 이들 문화재의 반환여부는 자칫 양국관계를 미묘하게 만들 소지마저 안고 있었다. 김이 밀반입하여 국내서 팔려던 문화재를 감정한 전문가들은 “김씨의 행위는 범죄가 분명하지만 국내에 없는 희귀한 진품 문화재를 보게 된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에 대한 보도가 나간 4월 7일 신문사에는 적지 않는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놀랍게도 특수강도혐의로 구속된 김에 대해 독자들의 반응이 이상할 정도로 친근감과 동정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골동품을 강탈해온 김을 ‘의적’이라고까지 표현을 했다고 한다.
부산시경이 일본 원정 강도범으로부터 압수한 국보급 골동품 9점(청자 6점, 백자 3점)의 처리문제를 놓고 수사당국과 학계, 문화재 관계기관 등 사이에서 여러 입장을 밝히고 있어 관심을 모았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문제의 도자기들은 법원의 판결에 의해 반환여부가 결정되겠지만 엄밀히 따지면 우리의 문화재이기 때문에 78조(외국문화재 보호)규정에도 적용되지 않아 반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김씨의 절도행위는 범죄임에 틀림없지만 우리 문화재를 되찾은 것이므로 반환은 할 수 없다”며,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 반출된 문화재 반환을 정부차원에서 펼칠 것을 촉구”했다. 또한 일단 반입된 골동품의 일본 반환은 문화재보호법과 외국환관리법에 따라 반출이 불가능하다는 게 반환불가론 자들의 주장이다.


현행 문화재보호법 21조는 “문화재의 국외전시 등 국제적 문화교류를 목적으로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국보, 보물이나 중요한 민속자료는 국외로 수출, 반출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현행 문화재보호법은 어떠한 형태로든 일단 국내에 들어온 문화재는 문화부장관의 허가 없이 밀반출이 금지돼 국내에서 소장하든지 또는 국내에서만 처분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그동안 각종 외교채널을 통해 일본 측에 문화재 반환을 요구해 왔던 외무부는 앞으로 예상되는 일본 정부의 ‘장물 인도요청’에 대한 대처방안을 놓고 고심이 컸다.


외무부는 이 문제가 한일외교 문제로 비화돼 오는 5월 말로 예정된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 일본 측과 충분한 협의를 통해 신중히 대처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외무부의 한 당국자는 “우리 정부가 문제의 한국 골동품 9점을 반환할 법적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호주의원칙에 따라 우방국의 범죄인 및 장물인도 요청에 응하는 게 외교적 관례”라면서도 “그러나 노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우리 정부가 한국 문화재 반환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는 마당에 방법이야 어쨌든 우리 손에 들어온 문화재를 일본 측에 돌려준다면 국민 감정상 용납되겠느냐”고 고충을 토로했다. 외무부는 또 “일본 정부는 지난 65년 한일문화재협정으로 이루어진 1천4백여 점의 반환으로 모든 의무를 다했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고 그들의 성의 없는 태도를 성토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번 사건의 주무 부서로는 법무부인 만큼 법무부측의 판단에 따라 외무부 차원의 처리방안을 마련할 것”이라 했다.
수사당국과 문화재보호 당국은 “현재 한·일 양국 간에 사법공조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은데다 일본이 유네스코 문화재인도협약에도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골동품을 돌려줄 의무가 없다”며 일단 반환을 거부했다.


우선 법적인 측면에서 이 사건은 내국인의 국외범죄에 해당해 형법의 규제를 받게 된다. 현행 형사소송법은 ‘압수한 장물로서 피해자에게 환부할 이유가 명백한 것은 피해자에게 환부하는 선고를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피해자인 히가사가 요구할 경우 판결을 통해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 범죄가 국내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법권이 미치지 않는 일본에서 일어났다는 점에 미묘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경우 범죄인인도법에 따라 처리되지만 이 법은 양국 간에 사법공조협정이 체결된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이 같은 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범인 인도와 마찬가지로 일본에 넘겨줄 의무는 없다는 것이 수사당국의 기본입장이었다.
더욱이 이 골동품들이 원래 우리나라 것으로 일제 때 반출된 것이 분명한 만큼 반환여부에 대해 섣부른 결정을 내려 반일 민족감정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유네스코 국제문화재협약에 따르면 장물로 타국에 반입된 문화재는 원소유국에 되돌려주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 중국 등에서 숱한 문화재를 강탈해 갔기 때문에 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 협약에 가입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 정부 측으로서는 우리 정부에 공식적으로 인도를 요청하기도 어렵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입장에서 일제강점기에 불법으로 가져간 것을 내놓으라고 하면 그들도 곤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요구는 하기가 어려운 입장이었다.


우리 측 정부가 양국 간의 관계를 고려하여 돌려주겠다는 정책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 한 법적으로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학자는 “국가가 지정한 문화재와 골동품은 엄격히 구분해야 하며, 일본에서 밀반입해온 골동품이 일제 때 반출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 것이라는 주장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부 학자들은 “아무리 우리 것이었다 해도 절도범이 훔친 물건을 문화재로 국가에서 소장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훔쳐온 물건을 일단 돌려준 뒤 정부 차원에서 정정당당히 되찾아오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결말.

일본으로의 반환 여부를 놓고 국민들의 관심을 모았던 이 사건은 일본인 피해자 히가사가 무조건 한국에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혀 깜짝 놀라게 했다. 피해자 히가사는 경찰에서의 피해자 진술과 골동품 반환 요구를 하기 위해 1990년 4월 8일 한국에 입국했다. 1990년 4월 10일 오전에 부산시경에 출두하여 피해자 진술을 마치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도난당한 골동품 모두를 한국법에 따라 조치를 마친 후 아무런 조건없이 한국 정부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히가사는 “이들 피해품은 20~40년 전 일본 고베시의 한 고미술상에서 수집한 것으로 지금까지 자식처럼 소중히 매일 아침 차를 마시며 감상하는 것을 낙으로 삼아 왔다. 한국 골동품 9점을 강탈당한 후 충격을 받아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골동품을 한국 정부로부터 돌려받으려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8일 한국에 건너와 일제 때 동양상업학교 동창생인 친구 조정호 씨를 만난 후 한국 여론 등을 듣고 “반환문제를 놓고 한·일 간의 법적문제는 물론이고 민족감정까지 야기되는 등 양국 정부에 누를 끼치는 것 같아 아무 조건 없이 기증할 결심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당시 각 신문들은 “고려청자 등 문화재 9점이 우리나라에 귀속되게 되었다”고 대서특필 했다. 이로써 골동품 중개상 김수홍 등에 의해 1990년 3월 12일에 밀반입된 문화재 9점은 장물에 관한 형사소송법 처리 절차에 따라 법원의 판결을 거친 후 국가에 귀속되는 듯 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한·일 간의 외교문제로 번질 것을 우려한 이 사건은 잠시 휴면하는 것 같이 있다가 대통령의 방일이 끝난 후에 다시 이어졌다.

사건의 결말.

부산지법은 일본에서 강탈해온 고려청자 등 골동품 9점의 환부 결정을 내린데 이어 부산지검도 이 결정에 대해 항고를 포기함으로써 문제의 골동품 9점이 일본인 소유자에게 돌아갔다.

부산지검은 1990년 9월 10일 법원의 골동품 환부결정에 대해 “실정법상 뚜렷한 대안이 없다고 판단돼 항고를 포기하고 부산시경에 문제의 골동품을 가환부토록 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법조계, 학계, 시민 등 각계에서는 “법원의 환부 결정은 장물인 문화재의 소유권이 법률적으로 피해자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해 준 것일 뿐”이라며 “소유권이 피해자에게 있다는 것과 반출을 허가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문화재 반출 여부는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를 보였다.

한편 문화부는 이날 “이 사건은 부산지법 판결을 통해 환부 결정이 난 것으로 별도의 조치없이 해외 반출이 가능한 사안”이라며 골동품의 일본 반출을 허가했다.이렇게 하여 한국에 들어왔던 청자 등 9점의 골동품은 유유히 일본으로 다시 돌아갔다.

히가사가 1990년 4월 당시 기자들과의 회담에서 “조건없이 기증을 하겠다”고 밝힌 이상 정부차원이든 민간차원이든 포기각서와 기증에 대한 분명한 문서를 받았어야 했었다. 하지만 이런 실무에 대한 것을 소홀히 하고 말았다. 히가사는 기자회담에서는 “조건없이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아무런 절차나 조치를 취하지 않고 돌아갔다. 노 대통령의 방일이 끝나자 마음이 바뀐 것이다. ‘기증하겠다’고 했을 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부산고법은 골동품을 강탈·밀반입 했다가 특수강도절도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김수홍 피고인에게 원심을 깨고 집행유예 4년을 선고 석방했다. 또 공범 김정일에 대해서도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하고 석방했다.

재판부는 “타인의 소장품을 강탈한 것은 중죄로 다스려야 마땅하지만 빼앗긴 문화재를 되찾아야한다는 의협심으로 저질은 정상을 참작하여 이같이 선고 한다”고 했다.

일본으로 되돌아간 9점의 골동품은 1995년 1월 17일 고베시를 휩쓸었던 관서대지진으로 모두 파손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도자기는 곡절도 많았지만 결국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 정규홍의 불법 부당 반출 문화유산의 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발표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