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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의 《송자대전(宋子大全)》 목판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3-11-15 12:23
조회
117


2점의 《송자대전(宋子大全)》 목판의 가치를 알아보기 송시열의 문집 간행 내력을 먼저 알아보자.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문집은 크게 세 차례 발간되었다.

◇ 황강본 : 문인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우암의 시문을 모아 선사(繕寫)한 100여 권이 있어서 이를 <黃江本>이라고 하였다. 이후에 발간된 문집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었다.

① <운각활인본(芸閣活印本)> : 1717년(숙종 43) 왕명으로 민진후(閔鎭厚)가 임금의 명을 받아 교서관에서 금속활자로 《尤庵集》과 別集을 간행하였다. 교서관에서 활자로 인출할 때 시일이 촉박해서 <黃江本>의 시문이 거의 반도 수록되지 못한 형편이었다.

《우암선생집》 운각활인본 국립중앙도서관본

 

② 1787년(정조 11)에 평양 감영에서 이명식(李命植, 1720~1800)이 《宋子大全》 102책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하지만 그 첫권과 연보는 서울의 교정소에서 별도로 간행되었으며, 총 215권 102책의 전서(全書)를 완성하여 『송자대전』이라고 하였다. 이 책은 이른바 신본(新本)으로, <黃江本>과 <芸閣活印本>을 합쳐서 한만하고 중첩되며 잘못된 것을 삭거(削去)하고 <黃江本>과 <芸閣活印本>에 빠진 것을 모아 덧붙인 것이다. 우암의 문집으로는 가장 완비된 것이었다. 고 閒漫, 重疊, 贋誤 등을 刪去하고, 兩本에 누락된 것을 모아 덧붙인 것이다.

이 책판은 정조의 지시로 우암이 노년을 보낸 화양동(華陽洞)에 건립된 화양동서원의 장판각에 보관되었다. 그러나 1907년 9월에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에 대한 반일의병(反日義兵)이 봉기한 1907년 9월에 장판각이 있던 환장사(煥章寺)가 의병의 유숙처라는 이유로 일본수비대에서 파견한 진압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그간 이 목판은 모두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③ 1927년에 후손과 유림의 노력으로 대전 남간정사(南澗精舍)에서 중간(重刊)하였는데, 이때 후손 송병선(宋秉璿)이 『송서습유(宋書拾遺)』 4책을, 송병기(宋秉夔)가 『송서속습유(宋書續拾遺)』 2책을 보완하여 총 108책이 되었다. 이 『송자대전』에는 부(賦)·시(詩)·소문(疏文)·계사(啓辭)·서계(書啓)·서(書)·잡저·서(序)·기(記)·발(跋)·명(銘)·잠(箴)·찬(贊)·애사·제문·비문·묘지·묘표·시장(諡狀) 등이 수록되어 있다.이 목판은 총 11,023판으로, 현재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 송영달이 소장하고 있으며, 1989년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이를 통해 살피면 송자대전은 1787년(정조 11)과 1927년에 두 차례 목판으로 제작되었다. 만약 이 목판이 1787년에 제작된 목판이라면 모두 소실된 줄 알았던 목판 가운데 일부가 전하는 것으로 대단히 우수한 자료라고 할 것이다. 이것이 1907년에 소실되고, 1927년에 다시 제작한 것은 현재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 설명에서는 그 소상한 내용을 알기 어려운데 지정 내용으로는 「송자대전판」 11,023판 5,151매라고 하였다. 이 수량은 충청남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을 당시의 수치인데, 이는 목재 문화재의 특성상 정확한 현황 파악이 어려웠던 시기에 헤아린 것이다. 2013년 충북대학교 우암연구소에서 진행한 목판 전수조사에서 정확한 수량 파악이 이루어졌는데, 현전하는 목판은 송자대전만이 아니라 4종, 4,889장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정서분류 403판, 원주원씨세보 1판, 소학집주 1판 등 405판은 「송자대전판」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1927년 5,280매로 제작된 송자대전 목판은 현재 4,484장이 남아 애초에 제작된 목판에서 796장이 빠진 상태였다. 아마도 두 점의 목판은 빠진 796장 가운데 두 점으로 추정할 수 있지만, 1787년에 제작된 목판과 사진으로 구분이 어려워 정밀한 조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차례 가운데 어느 것이든 대단히 소중한 자료임에 틀림이 없다.

 

권189가 담긴 목판은 소장자가 글자에 금니를 바르고 손잡이 나무를 교체하고 구리 장석을 부착하였는데, 이는 오히려 문화재를 훼손한 것이며 교체한 손잡이 나무는 열대지방 나왕이어서 대단히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