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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신 경휘(景暉) 묘지석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3-11-02 11:41
조회
110


01 公諱暉字皇考方進為樞密院堂

02 後官早死皇祖雲章為御史雜端將

03 作少監知制誥公幼孤依母長事母孝謹

04 母參知政事集賢殿大學士李元膺女

05 公初偹嘗艱難不易其志初祿仕陽□

06 又赴永淸縣令二邑政理率以慈愛元加民

07 便之貞祐九年辛巳夏拜閤門祗候冬又除

08 監察御史累迁吏兵部員外郞刑部右司

09 郎中衛尉少卿自少卿越侍郞超拜三品至

10 判司宰事致仕亦希矣哉公性識該愽

11 天文地志極通無隱凢國家之利害後

12 當成敗者皆黙數而知之若合符節意

13 自壯年至致仕末歲未嘗志國家事□□

14 屹屹探天地陰陽曆數兾復延匡祚□□

15 平豈忠乎哉公年七十又五亦壽矣□□□

16 品貴矣食祿三百富矣真所謂長守

17 也今又脩然坐化豈凢俗人哉之死也可慶

18 不可弔有子二人長曰瑜次曰瑋瑜性好

19 恬靜早登高第為學官在庚寅年

20 同寮姧悻者憚其直以非語構禍因

21 □江南俄而召還今未復調豈□

22 □□氏有子如是家業不惰日

23 遠傳哉以乙未九月十九日卒于□

24 第取十月初五日□□葬于江

25 華縣靑浦南麓詞曰

26 是惟不朽之城⎵旣宜其□

27 又宜其生

공의 휘는 휘(暉)요 자는 (무엇)이다. 아버지 방진(方進)은 추밀원(樞密院) 당후관(堂後官)이었으나 일찍 죽었고, 할아버지 운장(雲章)은 어사잡단(御史雜端) 장작소감(將作少監) 지제고(知制誥)였다. 공이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 의지하여, 장성해서는 어머니 섬기기를 효성스럽고 근실하게 했다. 어머니는 참지정사(參知政事) 집현전(集賢殿) 대학사 이원응(李元膺, ?~1160)의 딸이다.

공은 온갖 어려움을 두루 겪었으나 그 뜻을 바꾸지 않았다. 처음 벼슬살이는 양□(陽□)을 맡았고, 다시 영청 현령(永淸縣令 평안도 평원군)에 부임하니, 두 읍을 다스리는데 모두 자애로움으로 이끌기에 더욱 힘쓰니 백성이 편하게 여겼다. 정우(貞祐) 9년 신사(1221) 여름에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되었고, 겨울에 또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제수되었다가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이부(吏部)와 병부(兵部)의 원외랑(員外郞), 형부(刑部) 우사낭중(右司郎中), 위위소경(衛尉少卿)이 되었다. 소경(少卿)에서 시랑(侍郞)을 건너뛰어 3품으로 직급을 초월하여 임용되어 판사재사(判司宰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으니 또한 드문 일이로다.

공은 자질이 해박하였으며 천문과 지지(地志)를 가장 통달하여 밝히지 못할 것이 없었다. 무릇 국가의 이해가 달린 사안의 사후 성공일지 실패일지 모두 묵묵히 헤아려 보고서 알았으니, 마치 부절처럼 들어맞았다. 뜻이 장년부터 치사(致仕)한 말년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나랏일에 뜻을 두지 않음이 없었으니 □□처럼 우뚝하도다. 천지(天地)‧음양(陰陽)‧역수(曆數)를 탐구하여 바른 곳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랐고 ‘祚□□平’을 한 것이 어찌 충성이 아니었겠는가. 공의 나이 75세이니 또한 장수하였고, (직위가 3)품이니 귀하셨고, 식록(食祿)이 300석이니 부유하셨으니 참으로 이른바 부귀를 오래도록 지킨 것이다. 지금 또 단정히 앉은 채 돌아가시니 어찌 평범하고 속된 사람의 죽음이겠는가. 경하할 일이지 문상할 일이 아니다.

 

아들 둘이 있으니, 맏이는 유(瑜)이고 둘째는 위(瑋)이다. 유는 성품이 조용한 것을 좋아했는데 일찍이 과거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해 학관(學官)이 되었다. 경인년(1230, 고종 17)에 동료 중 간교한 총애를 받는 자가 그의 올곧음을 꺼려서 근거 없는 말로 화를 얽은 일로 인하여 강남으로 (귀양 갔다가) 머지않아 소환되었으나 지금까지 다시 조용(調用)되지 못하였으니 어찌 □하겠는가? □氏에게 아들이 있는데 이처럼 가업에 게으르지 않으니 훗날 전해지리로다. 을미년(1235, 고종22) 9월 19일에 □의 집에서 돌아가셨고 10월 15일 (□시)에 강화현(江華縣) 청포(靑浦) 남쪽 산자락에 장사하였다. 명사(銘詞)는 다음과 같다.

이곳 영원히 지켜질 성곽은 是惟不朽之城

이미 그분의 (무덤으로) 마땅하니 旣宜其□

그분이 태어나심도 마땅했다오 又宜其生